유자광은 정말 간신이었을까?

 유자광은 누구?

유자광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 봅니다. 유자광은 조선 전기에 활동한 문신으로, 병조정랑, 한성부판윤, 장악원제조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1439년에 영광 유씨의 서자로 태어나서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다섯 임금을 모시며 두 번이나 공신으로 책봉되고 군의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남이의 모반을 고변하는 등 여러 번의 공로를 세웠으나, 대간과 홍문관·예문관의 탄핵으로 유배되어 1512년에 죽었습니다.

유자광의 가족

유자광의 가족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아버지: 유규 (柳規), 부윤 (副尹)을 지낸 문신
- 어머니: 미상
- 처자: 미상
- 적자 (嫡子): 유종 (柳鍾), 병조참지 (兵曹參知)를 지낸 문신
- 장자 (長子): 유순 (柳淳), 병조참지 (兵曹參知)를 지낸 문신
- 손자: 유희 (柳煇), 병조참지 (兵曹參知)를 지낸 문신
- 증손자: 유흥 (柳興), 병조참지 (兵曹參知)를 지낸 문신

유자광의 가족은 대부분 병조청 (兵曹廳)에서 벼슬을 했으며, 유자광이 익대공신 (翊戴功臣)으로 책봉되었을 때, 그의 부모와 처자에게도 벼슬을 주고, 적자와 장자는 세습하여 그 녹 (祿)을 잃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자광이 중법에 처해져 유배되고 정국공신의 호 (號)마저 삭제당하자, 그의 자손들도 먼 지방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문은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습니다.

유자광이 살았던 시대 사회적 상황

유자광이 살았던 시대는 조선 전기로,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다섯 임금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사회적 상황이 있었습니다.

- 세조는 세종의 죽음 후에 일어난 강화도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국정을 개혁하고 외세에 대비하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세자와 그의 측근들을 학살하는 등 폭정을 행했습니다. 세조는 자신의 죽음 직전에 예종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 예종은 세조의 죽음 후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실제 권력은 대왕대비인 정경왕후가 잡고 있었습니다. 예종은 정경왕후와 대립하는 남이와 함께 정경왕후를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예종은 1470년에 갑작스럽게 죽었고, 그의 죽음은 정경왕후가 음모를 꾸민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 성종은 예종의 죽음 후에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정경왕후와 남이를 처형하고, 국정을 개혁하고, 문화와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성종은 명나라와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성종은 1494년에 죽었고, 그의 장례식에서 연산군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 연산군은 성종의 장례식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명나라와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왜구와 친화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연산군은 국내에서도 많은 비난을 받았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위되었습니다.
 
- 중종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에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고, 명나라와 화해하고, 문화와 학문을 재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중종은 1544년까지 장수하여 통치했으나, 그의 시대에도 여러 번의 난리와 왜구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유자광이 살았던 시대는 조선 전기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유자광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여러 차례 공로?를 세웠지만, 결국 탄핵과 유배로 인해 비운의 끝을 맺었습니다.

유자광은 간신일까?

유자광이 간신인지 아닌지는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유자광은 조선 전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무관으로,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다섯 임금을 모시며 두 번이나 공신으로 책봉되고 군의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서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과 처세로 정 1품까지 올랐으며, 육조의 정랑과 오위도총관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이시애의 난과 남이의 역모를 진압하고, 중종반정에도 참여하는 등 여러 차례의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유자광은 또한 조선의 4대 사화 중 두 번이나 그 중심에 있었고, 역모 사건까지 고변하는 등 역사적 회오리를 몰고 온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당시 조정에 진출해 세력을 모으고 있던 젊은 유학자 집단인 사림파의 씨를 말렸으며, 수많은 사람을 음해하고 무고하여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는 권력을 탐하는 간신이라는 오명을 받아 평생 탄핵과 유배로 고통받았습니다. 유자광에 대한 평가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많은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유자광을 철저한 신분 사회의 벽을 허물고 한 계단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해 스스로 ‘운명의 사다리’를 만든 당대 최고의 처세가라고 평가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유자광을 자신의 영달과 야망을 위해 남을 해하고, 군주를 농락했으며, 백성과 조정의 안위를 전혀 고려치 않은 간신이라고 비난합니다. 유자광이 간신인가 아닌가는 결국 어떤 관점에서 그의 행적과 사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만으로는 그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 아닐까?

유자광은 조선 전기에 활동한 문신으로,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다섯 임금을 모시며 두 번이나 공신으로 책봉되고 군의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이시애의 난과 남이의 역모를 진압하고, 중종반정에도 참여하는 등 여러 차례의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유자광은 또한 조선의 4대 사화 중 두 번이나 그 중심에 있었고, 역모 사건까지 고변하는 등 역사적 회오리를 몰고 온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당시 조정에 진출해 세력을 모으고 있던 젊은 유학자 집단인 사림파의 씨를 말렸으며, 수많은 사람을 음해하고 무고하여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는 권력을 탐하는 간신이라는 오명을 받아 평생 탄핵과 유배로 고통받았습니다.

유자광은 조선 전기의 역사적 인물로서 그의 행적과 사상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대와 환경에 맞춰 변화하고 발전하는 법을 배웠으며, 어떤 어려움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격언을 실천한 인물이라고 할 수 도 있습니다. 그의 삶은 각자도생이라는 현재의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생존 방식을 알려 주는 약간의 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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