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 대원군의 정치 개혁 (2)

 흥선대원군의 정치 개혁에 관한 두 번째 내용은 다음에 관하여 알아본다.

  • 경복궁 중건 사건
  • 전체적인 사회 개혁
  • 흥선 대원군 정치 개혁의 의의 및 한계

 경복궁 중건

목적

임진왜란 중 불탄 후 방치되어 흉물스러운 경복궁을 중건하여 조선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중건 과정

  • 원납전 징수 : 원해서 납부하는 돈'이라는 의미로 일종의 기부금이었으나, 실제로는 각 고을 단위로 할당량이 부과되어 강제로 징수하였다.
  • 당백전 발행 : 당백전은 상평통보에 비해 액면 가치가 100배였으나, 실질 가치는 5~6배 밖에 되지 않았다.
  • 당백전의 남발로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폭등하 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발행을 중단하고 청전(청나라 동전)을 수입하였는데, 이 것 역시 품질이 불량하여 화폐 경제를 악화시켰다.
  • 세금 징수 : 한양의 4대문과 4소문에서 도성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문세 (통행세)를 거두었다. 이외에 조세에 덧붙여 1결당 100 문의 결전을 징수하였다.
  • 양반과 백성의 반발 : 양반의 묘지림을 벌목하고 백성들을 토목 공사에 강제 동원하 였다. 경복궁은 8년 만에 완공되었지만(1872), 무리한 중건으로 양반과 백성의 원성을 샀다.
당백전


경복궁 중건 관련 사료

<경복궁 타령>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이 밝아온다.
(후렴)에 - 에헤이 열릴 거리고 방아로다.
을축년 4월 갑자일에 경복궁 새 대권 짓는데 첫방아 찧는 소리다.
조선의 여덟 도 좋다는 나무는 경복궁 짓노라 다 들어간다.
도편수란 놈의 거동 보소, 먹통 매고 갈팡질팡한다.
남문 밖에 떡장수들이 한 개를 베어도 큼직큼직 베어라!
남문 열고 바라동당 치니 계명산천에 달이 살짝 밝았네.
경복궁 역사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족을 만나볼까?

사료해설 

경복궁 타령에는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고역에 시달리던 수 많은 백성들의 원성이 담겨 있다.

 황현 <매천야록>

경복궁 중건에 대한 비판
경복궁 중건을 시작할 때 재정이 메말라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8도의 부자 명단을 뽑아서 돈을 거 두어들였다. 그리하여 파산자가 잇달았다.
이때 거두어들인 돈을 원납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백성 들은 입을 비쭉거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원납전(願納錢 원해서 바친 돈)이 아니라 원납전(怨納錢 원망하며 바친 돈)이다. "
이때 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였다.
성에서는 문세전(통행세)을 받았다.

사료 해설

초기에는 국유림에서 벌목하고 국가재정과 원납전으로 공사를 진행했으나, 모아둔 목재가 화재로 불타면서 사유 지 발목과 당백전발행 등의 무리한 정책을 남발하였다.

사회 개혁

사치 억제 

테두리가 작은 것에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도록 권장하였다.
 
뱃대를 짧게 자르게 하였으며, 흰 신발이나 비단 신발 대신 검정 신발을 장려함으로써 허례허식과 사치를 억제하고 풍속 개량에 힘썼다.

토호의 부정방지

양반과 지방 토호들의 백성에 대한 사사로운 형벌을 엄금하고, 도고의 매점매석 행위를 금지하는 한편, 포구에서 세금을 징수하였다.

의의 및 한계

정치 개혁

홍선 대원군의 개혁은 국가 기강의 확립과 민생 안정에 기여하였다.

농민 탄압

초기에는 삼정 문란을 시정하면서 농민들의 환호와 기대를 받기도 했으나, 정치가 다시 문란해지면서 농민 봉기를 초래하였다.

동학의 최제우를 혹세무민(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임)의 죄명으로 처형 (1864) 하고, 이후 교조 신원 운동과 이필제의 난(1871) 등이 벌어졌다. 
이전 시기에 비해 소농과 빈농의 농민 봉기가 많아졌다.

체제 내 개혁

왕조의 통치 체제 유지와 전제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전통 체제 내에서 개혁으로 근대 사회를 지향하는 움직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내부 개혁은 실패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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